세미나 VII - 심보선
현대 사회에서 놀이의 결여
현 사회에서 공동체를 위한 심오한 대의나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것에 맞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유희적인 놀이를 수행함으로써 형성된다.
사회학에서 놀이는 개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놀이에 참여한다는 것은 개인이 하나의 역할을 갖게 되고, 구성원 모두가 일정한 규칙을 지키겠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갖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규칙이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구성원들의 필요에 의해 바뀔 수도 있고, 새롭게 바뀐 규칙은 다시 공동의 약속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놀이 속의 규칙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변경되고 수립되는 과정 속에 있다. 요한 호이징어는 그의 저서『호모 루덴스』에서 놀이가 단순히 부수적인 문화활동이 아닌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과 공동체 생활을 만족시키는 기능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놀이는 이전과 달리 노동과 일을 위한 주변부의 것으로 전락했고, 사회, 경제, 문화 등 어느 영역에서도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현대인의 역할은 찾기 힘들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사회에서 시를 이미지와 상징의 변형, 그 가변성을 노래하는 놀이의 최후의 보루라고 표현했다.
예술에서의 공동체, 공동체를 위한 예술
놀이의 보루로써 시를 이야기하자면, ‘문학은 끊임없는 글쓰기의 좁고 희미한 여백에서, 공동체의 가능성을 꿈꾸고 가능성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말과 행동으로 존재한다’는 심보선 시인의 말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물론 예술이 현장에서의 어떤 실천보다 강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거나 혹은 뒤늦게나마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다시 예술에서의 공동체, 공동체를 위한 예술을 관찰할 때 발견되는 것들, 예를 들어 기존의 감각적 질서를 교란하는 새로운 감각의 발현이라든가, 제도권 내에서 실천적 예술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 혹은 미적 완성도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류의 완결성 등에 의미를 부여했다. 즉, 예술을 통해 우리가 듣지 않던 것들에 대해 함께 귀 기울이고, 보지 않던 것들에 대해 함께 관찰하자고 권하는 것, 그것이 예술에서 ‘느슨하고 개방된 공동체’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