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VI - 정현
1) 정체성과 창작의 관계
현대미술에서 정체성이 큰 화두로 등장함에 따라 많은 작품에서 정체성에 대한 요구들이 핵심으로 작용하는 현상이 목격된다는 이야기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정체성은 근대 이후 개인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개념으로 내면의 요구가 아닌, 외부환경의 조건에 의한 타자화, 즉 외부의 요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80년대 이후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작가들은 이전의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지향점이 있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실존과 존재,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현은 정체성이라는 것이 제도나 개인의 정보를 담은 종이 조각, 즉 종이 위에 적힌 언어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한계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그 상실에 대한 주제로 작품을 보여주고 있지만 단순히 개인이 경험한 사건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제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덧붙여 어떤 사건을 겪었을 때의 단순히 외적 갈등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내면의 고민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 비평가의 태도 혹은 역할
정현은 이념만을 가지고 그림을 보는 태도에는 이론을 중심으로 삼고 미술을 도구화하려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의 현상을 미술로 환원한 사유, 즉 이미지로 연결하여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즉, 이론을 통해 재현의 의미를 과장해서 설명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미지와의 대화를 통해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추상적으로 보이는 작품에서도 그 작품과 만나는 중간지대(관람객이 가졌던 경험과의 공통점)가 생겨나면서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이 성립하는데, 최근의 한국미술이 단절, 파편, 흔적, 잔상, 찌꺼기 등 질서의 파괴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어떤 접점을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려는 서구의 움직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미 파편화되어 존재하는 역사를 재 접합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최근의 비평에 부재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비평가는 작가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전반, 예술계 전반에 대해 사유의 단서를 꺼내놓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3) 랑시에르 읽기
최근 자주 논의되는 랑시에르의 이론은 기술과 문명이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었지만 아직도 인간은 죽음과 해체를 이야기한다는 괴리 속에서 출발하여 미학의 정치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학에서 항상 논의되고 있는 재현의 문제들이 랑시에르의 이론에서는 시대의 권력과 재현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배치의 문제와 연결 지어져 있는데 배치의 문제는 특권층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증명하기 위한 법칙을 따르게 되고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정치성이 생겨나게 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과정들을 바라보면서 주체로서 외부의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으로 재배치할 수 있는 힘이 해방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과 행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중시했으며 단순히 정치적인 행동에 머무르는 것(Le politique)이 아닌 그 본질인 정치의 원형(La politique)을 추구했다. 정현은 전시가 일어나는 장소 자체를 좀 더 정치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곳, 즉 행위자가 아닌 참여자에 의해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자 정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확장된 전시 공간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