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Ⅱ
함께 읽은 「중개인: 매개에 관한 대화의 시작」(쇠렌 안드레아센, 라르스 방 라르센; 이하 「중개인」)은 큐레이터의 역할을 ‘생산’의 측면에서 검토하는 글이다. 큐레이터는 예술계 안에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 저자들은 당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널리 쓰이는 ‘매개자’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대신 페르낭 브로델의 ‘중개인’ 개념을 통해 질문에 답한다. 브로델에 따르면 중개인은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하여 ‘시장’이 형성되게 하는 자이자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의 상황을 모두 알고 상황에 개입하는 유일한 자이다. 중개인에 대한 독립된 존재론은 성립하지 않는데, 이는 중개인은 ‘교환’이라는 관계 안에서만 나타났다가, 거래가 성사된 다음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불투명함’ 때문에 중개인은 불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큐레이터는 글로벌 문화 자본주의 시스템의 중개인이다. 큐레이터는 “아주 구체적인 실용적 문제”와 “형이상학적 문제”를 동시에 다루면서 예술가-작품-비평가-시민에 이르는 다양한 층위의 경험을 매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큐레이터는 존재하는 작품에 응답하는 ‘반응적’ 존재가 아니라, 글에 인용된 들뢰즈의 말처럼 “궤도에 아이디어를 더하고, 영구적인 운동에 휘말리”는 수행을 통해 문화를 재생산하고 변화를 도모하는 자들이다.
끊임없는 대화와 글쓰기, 비평과 해석을 통해 무수한 지점을 잇는 일, 이 ‘매개/중개’의 작업을 통해 예술 생산을 이어가는 존재가 큐레이터라는 저자들의 설명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20여년 전 이들이 제시한 ‘중개인-큐레이터’만으로 2020년대 현재 큐레이터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 글은 1990년대부터 급증한 국제 비엔날레와 독립 큐레이터 모델을 둘러싼 담론이 활발하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개인들은 더 정교해지고 공고해진 시장과 관료주의적 제도 사이에서, 좁아진 운신의 폭과 그만큼 줄어든 영향력, 여전히 모호한 직업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와 바깥으로부터의 의심을 견디며 일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았는가? 지금은 큐레이터의 예술 생산을 형식적, 고정적, 비생산적 상태로 만드는 존재론의 존재가 아니라, 모호함과 분열과 불안정성 지속 내지 심화시켜 큐레이터 개인을 탈진시키는 존재론의 부재야말로 큐레이터의 예술 생산에 더 큰 위협이 아닐까?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감지되었다. “자유-중개인은 한 발만 잘못 딛으면 사기꾼이 된다.”는 불안과 “미술에서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이상과 “기관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이 되는 현실 사이에서의 혼란, “‘매개자’라는 단어 안에서 축소, 왜곡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전년도와 그 전년도에도 ‘큐레이터가 무엇일까? 어떻게 큐레이터가 되는걸까?’라는 비슷한 결의 질문이 화두였다는 전언도 있었다. 큐레이터의 정체성 찾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임을 짐작케 한다.
우선은 대화 속에서 나왔던 실마리들을 기록해둔다. ‘변두리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는 일,’ ‘듣고 말하는 자,’ ‘믿어지지만 숭배되지 않는 존재,’ ‘창작 노동.’ 나열된 단어들 속에서 변화한 시대와 큐레이터 상(像)의 흐릿한 윤곽이 그려진다. .
– 박세진 (DCW 2026)
쇠렌 안드레아센(Søren Andreasen)과 라르스 방 라르센(Lars Bang Larsen)의 「중개인: 매개에 관한 대화의 시작」(이하 「중개인」)은 관계를 연결하고 번역하며 협상하는 매개자로서의 큐레이터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연성이나 이동성, 자기생산과 같이 기존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는 해방의 언어가 기대를 모으면서, 이러한 관점은 1990─2000년대 비엔날레, 초국적 예술 네트워크, 독립 큐레이터의 역할이 확대되던 유럽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큰 설득력을 가졌다.
2026년 서울의 큐레이터들은 유연성이 불안정으로, 이동성이 과로로, 자기생산이 번아웃으로 바뀐 시대에 살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끊임없이 적응하며,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그러면서도 정해진 계약일에 따라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문화 노동자다. 끝없는 이메일과 보조금 신청, 복잡한 결재 체계, 불안정 계약, 과로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자. 이러한 요소들은 큐레이팅의 주변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개인」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이 쓰이고 읽힌 시공간─이를테면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 구미발 담론의 낙관주의와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2026년 문화 노동의 현실─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간극은 큐레이팅을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제 우리는 무엇에 관해 질문해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만든다.
– 박유준(박세희) (DCW 2026)
[큐레이팅의 주제들: 중개인]을 읽고
현경: 『큐레이팅의 주제들: 중개인』은 큐레이터십의 핵심에 매개자, 혹은 중개인으로서의 성격이 놓여 있다고 본다.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리, 기존의 질서가 교란되고 다시 재구성되는 자리, 바로 그곳에 큐레이터십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글이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을 경유해 큐레이터의 위치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합의된 질서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는 그 질서가 배제하거나 보이지 않게 만든 존재들이 등장하면서 발생하는 불일치의 사건이다. 이 관점에서 정치적 존재란 이미 주어진 정체성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 존재, 다시 말해 비-동일성의 중간적 상태에 놓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큐레이터 역시 그러한 위치에 있다. 큐레이터는 예술가도 아니고 관객도 아니지만, 바로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의미의 배치와 이동, 만남과 충돌의 조건을 조직한다. 큐레이터의 정치성은 이 중간적 위치에서 발생한다. 큐레이터는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자신을 확정하기보다 서로 다른 주체와 사물, 제도와 담론, 감각과 해석 사이를 가로지르며 비-동일성의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불안정한 틈새에서 큐레이터의 능동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큐레이터의 매개적 성격은 분명 큐레이터십의 중요한 조건이지만, 동시에 큐레이터를 하나의 ‘직업’으로 정의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직업인’으로서의 큐레이터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 이 질문은 우리 셋이 처음 모인 자리에서부터 발생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다. “큐레이터는 누군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 실천에 지속적으로 투신하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 끝내 직업으로서의 정의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중개인을 위한 존재론”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가?
이 지점에서 전문화의 문제가 다시 떠오른다. 큐레이터는 전문직인가? 전문가만이 큐레이터가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수많은 큐레이터들은 전문성을 획득하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과 재화를 투자하는가? 반대로 큐레이터가 전문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면, 큐레이터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지식, 경력, 네트워크, 언어 능력, 제도 이해, 행정 능력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큐레이터의 개방성과 비정형성을 강조하는 담론은 때로 이 직업이 실제로 요구받는 전문성과 노동의 강도, 그리고 그들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룰을 흐리게 만든다.
결국 이 글을 읽고 오히려 선명해진 것은, 큐레이터의 중간자성이 정치성의 조건인 동시에 취약성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큐레이터는 고정된 정체성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기 때문에 능동적인 의미 생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그들이 하는 일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이름과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이름과 위치를 얻기 위해서는 미술관, 비엔날레, 대학, 재단, 행정기관과 같은 제도 안에 소속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큐레이터는 제도를 비판하고 재배치하는 중개인이지만, 동시에 제도에 의해 승인받지 않으면 쉽게 불안정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존재의 취약성이야 말로 정치적 삶의 기반이라고 나는 믿기도 한다.) 큐레이터를 둘러싼 모순적 조건 덕분에‘자유로운 중개인’으로서의 큐레이터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느껴진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다른 역할/비유/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 오현경 (DCW 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