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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창작자 지원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세미나 Ⅰ- 최빛나, 드류 카후아이나 브로데릭

2025.03.29

Where do you come from?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준비하며, 비록 짧았지만 고군분투했던 나의 큐레토리얼 여정을 되짚어보았다. 이는 내가 무엇을 열망하고 희망했는지를 떠올려보는 시간이었고, 그 회상의 감각은 ‘어디에서, 어떻게 걸어왔는가’라기보다 ‘어떤 방향으로 휘청거려 보았는가’에 가까웠다. 휘청거림의 경험들을 살피다가 포착했던, 그 중심에서 홀로 흔들리지 않고 있던 유일한 질문은 ‘또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였다. 또다시, 사람을, 전시를, 이 시간을, 이 공간을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드류와의 대화에서, 큐레이터가 하나의 사건이나 사회적 상황을 전시를 통해 발화할 때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는 핵심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전략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좀 더 멀리, (행정가와 결정권자들의 방해로부터) 안전하게 도달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큐레이터라는 존재 방식을 휘청거림보다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상상해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전시가 품을 수 있는 기운과 힘(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을 몸동작으로 취하는 퍼포머 같았다. 어떤 방식으로 휘청거리며, 자신의 몸짓과 옷깃의 흔들림,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눈빛을 연결 지을 것인가를 ‘또다시’ 고민하고 있는 존재로 말이다. 

이후에 이어진 최빛나 큐레이터님과 드류의 하와이 트리엔날레 이야기를 들으며, 직접 보지 못한 이 전시가 앞서 내가 품었던 ‘또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나와 함께 던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하와이어 단어들이 생명, 사랑, 물과 연결되며 전시를 둥글게 감싸 나가는 것 같았다. 기존의 다른 비엔날레/트리엔날레가 주었던 피로감은, 동시대 담론의 장을 광활하게 조성하고 사회적 쟁점을 푹 찔러대며 예술이 할 수 있는 ‘지금’의 시급함을 마치 라벨링 스티커로 만들어 예술의 입 위에 붙이는 듯한 자기 존재 방식에서 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와이 트리엔날레는 지금 무엇이 와야 하는가를 지정하기보다는, 나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다시 여기에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마치 하와이의 활화산에서 마그마가 계속 분출되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지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이때의 새로운 땅은 정말 어딘가에서 툭 떨어진 생경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끓어오른 지구 저 아래편의 흐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축적된 감각과 기억, 질문과 움직임의 지층 위에 오래도록 새로운 것이 놓이는 곳.  

— 박수정

 

 

- “No hea mai ʻoe?” (어디서 오셨나요) 하와이 사람들은 서로를 만나는 자리에서 기본적인 절차이자 의례로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며 대화를 시작한다고 한다. 고향, 가족, 언어, 문화, 교육 등 개인적 서사가 묻어 나올 수밖에 없는 이 질문은, 어쩌면 각자의 배경을 감추고 또 들추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된 듯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선뜻 묻고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조각을 나누는 것은 그만큼 다른 이의 조각을 나눠 가질 준비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이의 조각을 내 안에 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지키는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이기도 하다. 둘러앉아 서로가 위치한 장소, 각자의 여정, 각자를 구성하는 세계의 일부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달리 살아온 우리는 어떻게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으며, 이 시간 후로 우리는 어디로 흘러갈까라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성근 관계를 휘감는 얇은 끈이 생겨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장소로 걸음했고, 워크숍이 지속되며 우리의 걸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우리의 걸음은 교차할 수 있을까?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물들 수 있을까?  

- 주어진 것을 귀히 여기는 마음, 받은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 다음을, 이어짐을 생각하며 돌보는 것. 이러한 Kuleana(책임/의무로 거칠게 번역될 수 있는)를 나누어 갖는 것이 하와이안 네이티브 공동체를 결속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된다는 것을 드류 브로데릭과 빛나님의 이야기로부터 공통으로 찾을 수 있었다. 단절과 전복의 힘이 우세할 때 연결과 이어짐의 힘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지금 딛고 있는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이어가고, 기록하고, 이야기해 나갈 수 있을까. 세미나 이후로 맴도는 질문.  

— 전지희

 

 

“말은 장소와 맥락 관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여러 다른 의미가 있는 듯 느껴지지만 사실은 다 연결되고 상관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아주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말들도 어딘가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일 테고 완전히 분리된 개개인들도 어느 면은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 아마도?) 서로를 짧게 소개하는 시간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내가 그 사람들과 어떤 부분이 닮았고 어떤 부분이 다른지 생각했다. 토착적인(indigenous) 세계관에서 다시 세계를 바라본다는 말은 그 자체로 퀴어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자본과 위계의 바깥에서 프로젝트를 구성하기를 말할 땐 내 경험을 대입해 보기도 했다. 입 밖에 나온 단어는 다른 모양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일견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공감과 오역에서, 구분선은 어디에 그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구성 방식은 상당히 신기하게 다가왔는데, 위계를 벗어나 공통감을 느끼면서 단단하게 팀이 된다는 감각이 무엇일지 알고 싶어졌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눈앞의 일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로써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내 위치와 분수를 파악하기와 나의 역할과 책임을 인지하기는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가? 매상 질문으로만 끝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난 다시 어디에 적을 두고 답을 내릴 수 있을까?  

— 한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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