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정여름 개인전 《복수》
2026 전시 전경,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서울
사진: 이의록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는 8월 26일(수)부터 10월 17일(토)까지 제15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정여름의 개인전 《복수》를 개최한다. 전시는 동명의 신작 영상을 중심으로 한국과 베트남,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까지 동아시아의 냉전 역사를 종횡하며 특정할 수 없는 힘의 논리와 그 안에서 역동하는 개인을 살핀다.
정여름은 장소에 관한 오랜 응시와 리서치를 통해 그 배면에 놓인 시간의 단층을 분해해 왔다. 그의 응시는 보는 법에 관한 끈기 있는 탐구다. 전작에서 시각 장치와 전쟁 기술을 이용해 직접 가거나 볼 수 없는 곳을 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온 정여름은, 최근 몇 년간 역사화된 장소의 기록과 현재의 풍경을 비교·대조하며 망각된 기억과 불협하는 시공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공적 아카이브와 사적 기억, 사변적 상상력을 교차시키며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의 흔적을 하나의 서사에 겹쳐 놓는다.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힘의 주인은 누구인가.
신작 〈복수〉(2026)는 한 인물의 자서전을 발견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1] 1920년대 초, 아버지를 찾아 처음으로 고향 땅을 떠나 기나긴 이동의 여정을 시작한 그는 베트남을 주무대로 동아시아 전역을 휘감은 정치적 해일을 따라 표류하게 된다. 자서전이 으레 그러하듯, 적당한 진실에 얼마간의 과장을 더해 쓰인 그의 삶은 명징한 이념이나 가치에 따른 선택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상황을 따라 이어지는 그의 이동은 주체적이라기보다 운반되고 있다는 감각에 가깝다. 지독한 힘의 소용돌이 안에서 그는 가족과 사업 등을 이유로 터전을 옮긴 자발적 이주자였다가, 체제에 충실히 복무하는 부역자가 되고, 그보다 더 큰 힘에 모든 것을 빼앗긴 군중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고향을 등진 이민자가 된다.
영상은 다큐멘터리의 문법 안에서 자서전에 담긴 한 인물의 궤적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여름은 내레이터의 입을 빌어 역사적 파장과 그가 내린 특정한 선택들이 교차하는 순간을 발췌한다. 화면에는 그 사건이 담긴 여러 푸티지와 현재의 장소가 이어지는데, 질감도 비율도 모두 상이한 장면들은 덜컥거리는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로 같은 시간을 통과한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시선이 멀어질수록 한 개인은 점차 소거되고, 그 자리에 이름도 얼굴도 특정할 수 없는 존재들이 남는다.
영상 안에 덩어리가 되어버린 개인이 있다면, 바깥에는 돌아갈 곳을 잃은 개인들이 있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설치 작업 〈양치기〉(2026)와 〈낮은 곳의 에이프런〉(2026)에는 목적을 상실했거나, 애초에 가진 적이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양치기〉의 화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고약한 겨드랑이 냄새를 지닌 여자다. 그는 정확한 목적지도 없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온 곳과 가야 할 곳을 생각한다. 냄새는 특정한 과거를 한순간에 불러오는 힘을 가졌지만, 맡는 이에 따라, 기억과 상황에 따라 번번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냄새라는 실체 없는 흔적만을 자신에 대한 증거로 움켜쥔 채, 그는 방향을 잃기 위해 풍경 속을 떠돈다. 움직이는 나만이 스스로의 고향이 될 수 있음을 믿으며.
그리고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그를 만족시키는 일을 제 소명으로 삼은 이도 있다. 〈낮은 곳의 에이프런〉 속 화자는 달리 가진 것은 없지만 무엇이든 쥘 수 있는 두 손으로 주인을 섬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오직 주인을 위하는 것만을 삶의 전부로 삼은 그가 주인의 만족을 위해 자행한 일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역설을 낳는다. 예기치 않은 힘의 이동은 관계를 전복시키고, 그 안에 놓인 개인을 끊임없이 재배치한다.
복수(複數)를 이루는 단수의 존재들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곳곳을 서성인다. 이들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여름은 힘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이들과, 그 자리를 뚫고 나오려는 모든 개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어딘가를, 혹은 무언가를 가리키기를 시도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 방향이 맞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일상이라는 유령 같은 단어로 표백된 풍경들이 흐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얼굴들이 남아 있다. 힘이 제 방향을 달리할 때, 모두는 서로를 향한 목격자이자 증인이 된다. 우리는 그들을 부를 언어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1] 전영상, 『길 따라 세월 따라: 한평생 살아온 봉사의 삶』(CREART, 2010)
— 유진영(큐레이터)
정여름(b.1994)은 장소와 기억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 매체로 변사하는 작가다. 개인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SeMA 벙커, 서울, 2023), 《HAPPY TIME IS GOOD》(합정지구, 서울, 2021)을 개최했으며, 두산아트랩 전시 2024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서울, 2024)에 참여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현대미술관(2026, 바르샤바, 폴란드), 하이트컬렉션(2023, 서울), 공간 힘(2022, 부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2021, 서울)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작품을 상영했다. 2024년 제15회 두산연강예술상 시각 예술 부문의 수상자이다.
관람시간: 화수목금토 11:00~19:00 / 일, 월, 추석 연휴 휴관
장소: 두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종로33길 15 두산아트센터 1층
무료관람 / 문의: 02-708-50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