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제로
2021 단채널 비디오(16:9),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9분 30초, 한영 자막
관람시간: 화수목금토 11:00~19:00 / 일, 월 휴관
장소: 두산갤러리 서울, 서울 종로구 종로33길 15 두산아트센터 1층
무료관람 / 예약제 운영 / 문의: 02-708-5050
두산갤러리는 신진기획자 양성프로그램인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 기획 전시 《un-less》를 2021년 7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의 10회 참가자 맹나현, 전민지, 정해선의 공동기획전시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도달했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 도달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다.”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공간의 종류들 Espèces d'espaces』(1974), 김호영 옮김(문학동네, 2019), p. 16.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 2020 기획전 《un-less》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란 상태, 즉 결여된 상태를 돌이켜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지구 곳곳에서 발생한 재난들은 그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태풍, 홍수, 지진, 가뭄 등의 자연적 재난 뿐만 아니라 9·11테러,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사회적 재난은 인류의 삶을 끊임없이 위협하였고, 사회에 본질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이처럼 인간은 오래전부터 예기치 못한 재난에 봉착할 때마다 기존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 왔다. 전례 없는 전염병으로 재난과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좁혀진 지금, 우리는 이전과 달리 무언가 결여되거나 결핍된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장대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기획자 3인이 질문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세상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낭만적 과거’라는 이름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나면, 그 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동시에, 무엇이 (불)가능해지는가? 결핍된 상황을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이를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후퇴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로써 본 전시는 결여된 상황 그 자체를 직시하고, 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아직 공백 상태로 남아 있는 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보고자 한다.
본 전시는 ‘인류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결여 혹은 결핍의 경험이 없었다면,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un-less’는 부재와 결여를 상징하는 접두사 ‘un-’과 접미사 ‘-less’의 합성어인 동시에, ‘~이 아닌 한’, ‘~하지 않으면’ 등을 의미하는 접속사 ‘unless’에서 비롯되었다. 즉, 무언가 사라지고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시작될 수 없었던 이번 전시는 결핍에 내포된 다층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에 전시 참여 작가 무진형제, 전하영, 최하늘, 후니다킴은 각기 다른 매체를 통해 그간 감지해 온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근미래에 유효할 대안적 관점 및 상상의 결과물을 신작으로 제시한다.
무진형제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낯설고 기이한 감각을 포착하여 우리 삶의 기반을 탐구해 왔다. 팬데믹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이한 지금, 이번 전시에서는 재난에 처한 동시대 인간에 대한 고찰을 담은 신작 <그라운드 제로>(2021)를 선보인다. 이 작품에서 재난은 순간의 극복이 필요한 일시적인 해결 대상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온 문명사적 필연이다. 영상 속 화면에는 금이 간 콘크리트 바닥 위에 놓인 9개의 인간 형상 토우가 등장한다. 이 9개의 토우는 바닥 위에서 망망대해를 유유히 떠돌아다니는 듯하다 급기야는 물에 의해 파괴된다. 그러나 영상이 거꾸로 재생될 때, 파괴되었던 토우는 기존의 형상을 회복한다. 작가는 재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 주목함과 동시에 현재에 순응하며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전하영은 위선과 젠더에 관한 문제를 첨예하게 다룰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을 벗어난 실험적인 서사를 발표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M으로의 내적여행>(2021)은 앞서 공개된 전하영의 단편 소설 <21년 5월 1일, 스프링클러 씨에게>(2021)의 일부로, 소설 속 문장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작업이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 깨어난 주인공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 머무른다. 마치 주인공이 미술관과 그 주변을 떠돌듯 전시장에서는 소설 속 문장들이 조각난 채로 작품과 관람객 사이를 오가며,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재난과 회복의 순환은 소설 속 주인공이 온전하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미술관 주변을 배회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최하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한 관심사를 조각 매체로 선보인다. 조각의 본질과 이를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 온 작가는 신작 <우리 가족>(2021)을 선보인다. 그는 조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질과 대지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본인의 작업에서 늘 선행되어온 치밀한 드로잉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그로 인해 탄생한 울퉁불퉁한 작은 동산과 그 위에 어설프게 모여 있는 조각 가족은 사회의 타자인 소수자, 즉 대안 가족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결여란 결코 부족하거나 모자란 상태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이다. 결여가 ‘결여되지 않은 것’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작가는 결여되지 않은 것과 결여된 것의 주류-비주류 관계를 교묘하게 전복시킨다.
후니다킴은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디지털로 변환하여 새롭게 감각한다. 특히 청각적 요소를 중심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사운드 설치 및 퍼포먼스를 선보여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신작 <ATTUNE>(2021)을 발표한다. 최근 끊임없이 조정되고 변화하는 환경을 직접 겪은 작가는 여러 형태의 관계 속에서 적정거리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GPS로 측정되는 작가의 현재 위치와 전시 공간 사이의 거리는 전시장 내 가청영역(헤르츠)가 된다. 전시장 한편에 위치한 스피커 구조물의 소리는 작가가 전시장에서 멀어질수록 작아지고, 가까워질수록 무방비한 소음이 되어 관람의 균형을 깨뜨린다. 어느 한쪽의 소리도 완성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는 <ATTUNE>은 그가 지금까지 탐구해 온 공감각적 사운드를 결여시키며,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와 더불어 미완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un-less》는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결여된 상황을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결여나 결핍의 인과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안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어온 변화가 인간을 통제하고 구속할 때, 능동적 주체는 이를 반추하고, (반성적으로) 타개하며, 이로부터 각성한다. 그러므로 전시장에 펼쳐진 대안적 상상은 헛된 꿈, 또는 공허한 것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껏 사용해본 적 없는 근육을 단련시키는 동시에, 유연하고도 첨예한 관점을 신체화하고 있다. 따라서 전시 《un-less》는 전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선례가 되기를 제안한다. 우리가 여기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이 사실을 인지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은 한국 현대미술계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신진 큐레이터를 발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매년 3명의 큐레이터를 선정하여 1년 동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 강의∙세미나∙워크샵으로 현대미술의 이론과 현장을 깊이 있게 다룬다. 1년의 교육기간 후, 두산갤러리에서 3명이 공동으로 전시를 기획해 봄으로써 1년간의 연구를 구체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큐레이팅 기회를 갖게 한다.